[한국인더스트리4.0협회 박한구 명예회장(전 스마트제조혁신추진단장)] 최근 ‘한국에 26만 장의 GPU 우선 공급’ 보도가 이어졌고(삼성·SK·현대·네이버·정부까지 물량이 배분됐다는 취지), 정부도 ‘AI 3대 강국’ 도약을 내걸며 10조원대 예산 확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국내 GPU 보유량=AI 경쟁력’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AI 경쟁력의 실체는 ①기초·응용 알고리즘과 모델 역량 ②데이터·표준·보안 거버넌스 ③산업 현장에 녹아 드는 적용·확산 능력이다. 인프라는 그 다음이다.
[AI 강국의 작동 정의]
사이언스·엔지니어링의 재정의
AI 강국은 ‘만들기 전에 먼저 가상 세계에서 다 만들어 보고’ 현장에 적용한다. GPU를 물리·화학·생물의 정확한 수치/기호 모델과 빅데이터 기반 AI에 동시에 투입해, 실제와 구분이 어려운 고신뢰 디지털트윈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설계–검증–최적화를 끝낸다. 신소재·신공정·신약 개발에서 실패를 줄이고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 연료는 세 가지다. △고성능 계산 능력(HPC/GPU) △믿을 수 있는 실험데이터 품질 그리고 △공장·설비 데이터를 한 표준으로 묶어 주는 AAS/OPC UA 같은 표준화된 데이터 모델이다. 한마디로 ‘현장에 가기 전, 컴퓨터 속에서 이미 수십 번 성공해 둔다’가 새로운 과학·공학이 될 것이다.
산업 오토노미(Autonomy) 전환
현장 운영도 사람의 손을 돕는 수준을 넘어, AI 에이전트와 로봇이 ‘예측→판단→조치’를 스스로 닫힌 고리로 수행한다. 공정 조건을 미리 예측하고(모니터링), 이상을 해석해 원인을 잡고(분석), 장비나 공정을 바로 조정한다(제어). 그 결과 3D(Dirty·Dangerous·Difficult) 업무는 최소화되고, 사람은 문제 정의·창의설계·의사결정 같은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한다.
시뮬레이션과 생산의 무손실 연결
디지털트윈에서 검증된 설계와 공정 레시피가 버튼 한 번으로 바로 생산설비로 넘어간다. 공장은 소프트웨어로 정의된(SDA/SDM) 방식이라 신제품 전환이나 공정 개선이 신속하다. ‘개발팀의 파일’이 ‘현장의 설정’으로 자동 매핑돼 시간·비용 손실 없이 생산이 이어진다.
다른 산업에서의 AI 정의·활용
이 방식은 전 산업으로 퍼진다. 바이오/의료는 유전체·영상·임상 데이터를 엮어 신약 타깃을 찾고 임상 설계를 최적화한다. 에너지/그리드는 수요·발전·설비상태를 통합 예측해 손실과 탄소를 최소화한다. 금융/공공은 리스크·사기 탐지와 정책 시뮬레이션, 민원·문서 자동처리로 효율을 높인다. 물류/모빌리티는 네트워크 최적화와 자율주행·V2X로 회전율을 끌어올리고, 농업/건설은 위성·드론·센서와 AI로 정밀 농업과 안전·자재 최적화를 이룬다.
콘텐츠/교육은 생성·편집 자동화와 개인화 튜터로 생산성과 학습격차를 개선하고, 국방/안보는 멀티클라우드·제로트러스트와 시뮬레이션 기반 합동작전 의사결정으로 민첩성을 확보한다.
결과적으로 AI 강국이란 국민의 노동이 더 많은 ‘지식 노동’으로 올라가고, 건강·안전·여가의 체감 성과가 실제로 늘어나는 나라다. 디지털트윈으로 먼저 성공하고, 자율형 공장으로 빠르게 실행하며, 표준화된 데이터로 전 산업을 연결하는 나라가 곧 AI 강국이다.
[왜 ‘국내 26만 GPU=정답’이 아닌가]
총소유비용(TCO) 관점
GPU 센터는 장비값보다 운영비가 훨씬 크다. 전기·냉각·고속 네트워크·인력·소프트웨어 스택 유지까지 모두 상시 운영비용(OPEX)가 붙는다. 게다가 AI 가속기는 세대교체가 빨라 3~5년 안에 리프레시가 필요하고, 새 세대의 성능·효율 이득이 커서 빨리 바꾸는 게 유리한 경우가 많다. 소프트웨어와 드라이버 지원주기도 짧아 꾸준한 업데이트, 교체 비용이 따라온다. 많이 사는 것보다 지속 운영 비용과 교체 주기가 TCO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보안·주권 : ‘클라우드=불안’은 오해
미 국방부는 여러 클라우드(AWS·Azure·Google·Oracle)를 묶는 멀티클라우드(JWCC)로, 본부부터 전장 엣지까지 동일한 보안·운영 모델로 사용한다. 주권·격리 요구는 싱글 테넌시(전용 호스트), 전용 리전, 고객키 관리(HSM/KMS), 컨피덴셜 컴퓨팅(TEE, ‘실행중’ 암호화) 같은 옵션으로 충족 가능하다. 최신 컨피덴셜 GPU는 모델·데이터가 사용 중에도 보호된다.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설계했느냐’다. 제로 트러스트, 전 구간 암호화, 테넌시 격리, 원격 무결성 증명(Attestation)을 설계하면, 물리적 위치보다 아키텍처가 보안을 결정한다.
유연성과 속도
연구·스타트업·기업 R&D는 수요가 들쭉날쭉하다. 자체 대형 데이터 센터는 평소 유휴(Idle)가 커지고, 세대 전환 때 대규모 교체 리스크가 생긴다. 반면 클라우드는 필요 순간 수천~수십만 GPU까지 온디맨드/예약으로 확장되어 납기·TCO·기회비용에서 유리하다.
따라서 국가 예산은 GPU 총량 늘리기보다 플랫폼·모델·툴체인, 데이터 표준·거버넌스, 도메인별 유스케이스 확산에 먼저 투입할 때 실질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많은 GPU가 해답이 아니라, 지속 비용(TCO), 보안 아키텍처, 수요 탄력성을 이기는 전략, 즉 표준·툴체인·유스케이스 중심 투자 + 하이브리드/멀티클라우드 활용이 정답이다.
[한국의 합리적 해법]
‘반(半)주권형 멀티클라우드+안티 사일로(DataSpace)’
한국의 대학, 기업에서 레벨0는 최고 보안, 레벨1은 빠른 확장, 레벨2는 표준+계약 기반 연결이다. 여기서 레벨0은 ‘금고 단계’다. 국가핵심 연구시설·원천 모델·보안 임계 데이터는 전용망/전용센터나 주권형(Sovereign) 클라우드에서만 처리한다.
가장 민감한 자산은 인터넷 밖 ‘금고’에 둔다. 레벨1은 ‘가속 단계’다. 일반 R&D는 글로벌 클라우드(예 : Microsoft Azure 등)의 싱글 테넌시(우리만 쓰는 전용 구역)와 컨피덴셜 GPU(실행 중 암호화/TEE) 조합으로 빠르게 규모를 키운다. 필요할 때 즉시 수천개 GPU를 안전하게 늘렸다 줄인다.
레벨2는 ‘연결 단계’다. 실제 산업 적용은 AAS/OPC UA로 공장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IAM/EDC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쓸지’가 계약된 데이터스페이스를 운영한다. 기업 내부와 기업 간 데이터가 규칙대로 자동 흐르고 재사용되며, SDM의 핵심 기반이 된다.
국가 거버넌스: 사일로를 ‘연결’로 바꾸는 규칙
먼저 모두가 같은 언어를 쓰게 해야 한다. 공장·설비 데이터는 AAS(IEC 63278)와 OPC UA 같은 국제표준으로 통일해 저장·교환한다. 표준이 맞춰지면 기업·기관이 달라도 시스템끼리 바로 연결되고 재사용이 쉬워진다. 다음으로, 보안과 주권(컨트롤)을 확실히 한다.
누가 어떤 데이터에 언제까지 접근할지 권한과 동의로 정하고, 전송·저장뿐 아니라 연산 중에도 암호화(컨피덴셜 컴퓨팅)를 적용한다. 데이터 소유자는 ‘내 데이터가 어디까지, 어떤 조건으로 쓰이는지’를 끝까지 통제한다. 운영은 산업별 협회 중심의 운영위원회가 맡는다.
이 위원회가 데이터 품질 기준을 정하고, 인증·감사를 주관한다. 즉, ‘쓸 만한 데이터인지, 규칙을 지키는지’를 상시 점검해 신뢰 가능한 생태계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국제 연계를 통해 글로벌 요구에 맞춘다.
EU의 Catena-X/Gaia-X 등과 상호운용 테스트를 정례화해 디지털제품여권(DPP)과 CBAM 같은 규제 대응 데이터를 국제적으로 통하는 형식으로 교환한다. 덕분에 수출 현장에서 ‘서류 되돌림’ 없이 바로 통과시키는 체계를 갖추게 된다.
결론적으로 표준으로 말 맞추고, 보안·주권으로 신뢰를 만들고, 산업별 조직이 품질·인증을 관리하며, 국제 연계로 DPP/CBAM까지 바로 통하게 하는 것이 사일로를 ‘연결’로 바꾸는 국가 규칙이다.
투자 우선순위 리셋
먼저 ‘GPU 더 많이 구매하기’에서 ‘쓸 줄 아는 능력 갖추기’로 방향을 바꾸자. 국가·기업의 예산은 ‘국내 GPU 총량’보다 ①잘 쓰일 모델·라이브러리·툴체인, ②데이터가 흐를 표준·거버넌스(AAS/OPC UA, IAM/EDC), ③현장에서 바로 돈이 되는 도메인별 유스 케이스 확산에 더 많이 배분해야 한다. 그래야 같은 GPU로도 더 빠르게, 더 넓게 성과가 난다.
(전 스마트제조혁신추진단장) [사진=인더스트리뉴스]
역할을 살펴본다면 먼저 대학·연구실은 하이브리드로 가속한다. 캠퍼스에는 필수 최소치의 자체 센터만 두고, 나머지는 클라우드 바우처로 필요할 때 확장한다. 이렇게 하면 논문급 성과 →파일럿(시제품)→산업 적용까지 이어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예로 실험은 로컬 GPU로, 대규모 학습·튜닝은 클라우드로 ‘버스트’ 처리→결과를 다시 현장 파일럿에 이식한다.
중소·중견기업은 ‘SaaS로 쉽게 시작, GPU는 필요할 때만’이 정답이다. 복잡한 설치없이 브라우저로 분석·시뮬레이션에 접속하고, 고성능 연산이 필요할 때만 클라우드 GPU를 시간 단위로 쓰면 된다.
이렇게 하면 서버를 사서 유지하는 고정비가 ‘사용한 만큼 내는 변동비’로 바뀌어 리스크와 초기투자가 크게 줄어든다. 예로 월 2~3회 공정 시뮬레이션에만 GPU 사용에서 나머지는 일반 SaaS 요금으로 운영한다. 결론적으로 더 많은 GPU보다 표준·툴체인·유스케이스에 투자하고, 연구는 하이브리드, 기업은 SaaS+온디맨드 GPU로 바꿔 빠르고 싸게 성과를 만든다.
‘인프라 집착’ 대신 ‘연결·표준·보안·확산’
AI 사일로의 뿌리는 ‘내 것 따로’ 문화다. 이제는 데이터가 흐르는 곳에 제조와 서비스가 따라가는 시대(SDM)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것은 자체 데이터 센터(On-premise) 총량 경쟁이 아니라, 글로벌 수준의 멀티클라우드 활용과 산업 데이터스페이스(DataArirang-X)로 사람·데이터·모델·현장을 연결하는 길이다. 그때 비로소 단순 노동에서 해방된 국민의 지식노동이 늘고,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이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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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손정의 ‘첫째도·둘째도·셋째도 AI’: 2019.07.04 청와대 접견(문재인 대통령). (동아일보) |






